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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7호 [버스 타고 떠나는 답사 이야기]식민과 억압의 역사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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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조회 894회 작성일 20-02-11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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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과 억압의 역사를 찾아서

서울 470번·741번 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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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지지성 조선대 대학원에서 사학을 공부했으며, 20여 년간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틈틈이 전국 곳곳을 답사하고 있다.

답사를 떠나며 해는 경술국치 110년 되는 해이다. 작년의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만큼이나 국치의 역사도 기억해야만 한다. 부정적 역사를 뜻하는 다크 헤리티지(Dark Heritage) 또는 다크 히스토리(Dark History)는 이러한 점에서 의미 있는 개념이다.
부끄러운 역사는 말고, 긍정적인 것만을 교육해야 한다면서 역사 교육의 재편을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군국주의와 식민 통치의 폭력성을 숨기고, 친일과 변절의 역사를 감추면서 그것을 진실이라 이야기한다. 이들이 존재하기에 더더욱 침략과 부역의 역사는 조명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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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히스토리 1 - 경복궁 경복궁 일대는 침략의 역사와 떼어 놓을 수 없다. 특히 광화문과 흥례문 사이는 지금은 비어 있지만 오랜 시간 총독부 건물이 자리 잡고 있었다. 김영삼 정권 때인 1995년 역사바로세우기 작업의 일환으로 철거되면서 지금은 관광객들이 채우고 있지만 말이다. 중앙청 건물이 무너지던 순간을 지금도 기억한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우르르 주저앉던 날, 식민의 잔재가 모두 해소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상징적인 날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흔적이라도 남겨 두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싶다. 어린 세대는 총독부가 어디에 있었는지 모른다. 어디에 있었는지 모르니 그곳에서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도 알기 힘들다. 그저 궁궐 앞 넓다란 광장이고, 수문장 교대식을 하는 신기한 장소일 뿐이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천안의 독립기념관에 가면 건물의 석재들이 일부 남아있다는 점 정도일 것이다.
그리고 가장 내밀한 곳 건청궁에서 명성왕후 민씨가 암살당했다. 그녀를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은 여전하다. 하지만 그녀의 삶이 쇠망해가는 조선의 국운과 함께하였음은 분명하다. 명문거족 여흥 민씨의 일족으로 흥선대원군의 부인인 부대부인 민씨의 동생 민승호가 그녀의 오빠로 입적된다. 즉 명성왕후는 고종의 이모가 되는 것이다. 몇 년 전 탄핵 정국 때 진령군의 이름과 함께 다시 언급되었으리만큼 국가를 혼란에 빠뜨렸으면서, 일본의 간섭을 극복하고자 노력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 그녀가 죽었을 때 고종은 일본인 낭인들의 칼 앞에서 꿈쩍도 못하였고, 흥선대원군은 낭인 무리의 길잡이가 되었다.
이 사건의 주동자인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는 현 아베 신조 총리와 같은 죠슈번벌(현, 야마구치현) 출신이다. 죠슈번은 일본 메이지 유신의 핵심 지역으로서, 조선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의 고향이기도 하다. 참으로 질긴 악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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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히스토리 2 – 덕수궁 돌담길 경복궁과 함께 찾아봐야 하는 곳이 대한제국의 영광과 아픔을 함께한 덕수궁이다. 경복궁이 조선의 정궁이라면, 덕수궁은 대한제국의 궁궐이다. 다만 궁궐 투어가 아니므로 덕수궁으로 들어가지는 않는다. 대한문의 왼편 골목길 이른바 덕수궁 돌담길을 걷다 보면 신문물을 수용하고자 했던 대한제국의 노력이 고스란히 들어온다.
골목을 들어선 지 10여 분 만에 보이는 서울시립미술관 자리는 조선말 평리원 터였다. 평리원은 지금으로 치면 중앙지검 같은 곳이다. 근대 사법체계의 등장을 알리는 곳이다. 평리원은 생소하지만, 헤이그 특사 이준(1859~1907)은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헤이그에서 사망한 이준이 바로 평리원 감사 출신이었다. 중앙지검 검사에 해당하는 인물이었다.
시립미술관 바로 옆에는 정동교회가 100여 년의 세월을 버텨내며 서 있다. 이곳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개신교 교회 건축물로,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학생들이 개화 이념과 종교적 신념을 나누던 장소였다. 더불어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3.1운동의 파급도 이곳을 매개로 이루어졌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과 유관순 열사가 이곳에서 신앙 활동을 했었다.
정동교회에서 조금만 더 걷다 보면 오른편에 덕수궁 중명전으로 향하는 골목이 나온다. 작은 골목이라 지나치기 쉽지만, 골목길에 젊은 경찰이 한 명 서 있으면 중명전 길목이니 그리 당황하지 않아도 된다. 이곳은 망국의 고통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현장이다. 을사오적과 이토 히로부미가 이곳에서 을사늑약을 논의했고, 이를 거부한 고종이 헤이그 특사를 파견한 곳이다. 중명전의 1층은 전시공간으로 2층은 사무공간으로 나뉘어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왼편의 회의 공간이 눈에 띄지만, 오른편 단출한 방을 먼저 둘러보길 권한다. 덕수궁과 그 주변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한 눈에 알 수 있게 설명하고 있다. 하얀색 모형만 보아서는 감흥이 없으니 꼭 버튼을 눌러 음성과 모형 위의 변화를 지켜보길 바란다. 덕수궁의 변화를 봤다면 건넛방 을사늑약의 회의장면도 둘러보자. 이토를 비롯한 이완용, 이지용 등 원흉들의 면면을 기억해두는 것이 이번 일정의 목표이다. 그리고 같은 자리에 있었으되 끝내 국가에 대한 신의를 지킨 한규설의 공간도 함께 있다. 역시 버튼을 통해 회의장에 참석했던 인물들에 대한 설명을 볼 수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은 그들에 대한 설명이 매우 단출하다는 점이다. 이완용의 증손자가 국가를 상대로 배상을 요구하는 재판을 했던 기록, 이지용이 기생 산홍에게 호되게 욕을 먹었다는 이야기, 당시 공중화장실을 ‘이-박 요리점: 변을 먹고 사는 개돼지와 같은 이완용, 박제순’이라고 불렀던 것 등의 내용이 더해졌더라면 더 의미 있는 전시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친일파가 어디 이들뿐이랴. 애국가의 안익태, 태극기의 박영효, 독립협회의 윤치호 같은 이들도 친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으니 말이다.
회의장의 건너편 또 다른 방에는 헤이그 특사를 파견했던 고종의 아픔이 담겨있다.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고 자주 국가 대한제국을 지키고자 했던 노력이 위임장들에 담겨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곳 중명전에서 헤이그 특사를 이유로 고종은 강제퇴위 당한다. 중명전 건물은 1925년 화재 이후 복원된 것이나 외벽은 남아있으니 대한제국에 들어온 서양 건축물의 일면을 볼 수 있는 좋은 공간이기도 하다.
중명전 골목에서 나와 오른편으로 길을 틀어 가던 방향대로 가다 보면 이화여고가 나온다. 이화여대는 이후 자리를 옮긴 것이고, 유관순 열사의 이화학당이 바로 이곳이다. 다만 학생 보호 차원에서 외부인들의 출입이 통제되어 있으니 유관순 열사의 발자취를 밟아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담장 너머 유관순 열사의 동상 뒤편을 바라보며 만족할 뿐.
그리고 이곳은 조선 후기 외교의 중심지였던 손탁호텔 자리이기도 하다. 러시아 외교관 베베르의 처형이었던 손탁(1854~1925)은 조선의 사교계는 물론 외교계를 장악한 인물 중 한 명이었다. 일본의 힘이 강해질수록 그녀에 대한 고종과 명성왕후의 믿음도 강해졌다. 그녀를 통해 일본을 견제할 세력을 형성하고자 한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친미·친러파 등 외교 그룹을 정동구락부라고 부른다. 구락부(俱樂部)라는 말이 이때부터 자주 등장하는데, 영어의 클럽(club)의 일본식 표현이다.
이화여고의 한옥식 정문 건너편 길을 조금 올라가면 아관파천으로 유명한 러시아 공사관이 나온다. 명성왕후가 죽고 일본의 강압은 말로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유길준이 고종의 상투를 강제로 자른 것도 이때였다. 정동구락부의 핵심인사들은 고종을 미국공사관으로 피신시키고자 했다. 이른바 춘생문 사건이다. 그러나 내부 밀고로 이 시도가 실패로 끝나면서 고종에 대한 감시는 더욱 강화되고, 정동구락부는 약해졌다. 그러던 중 전국적인 의병이 일어나면서 고종을 감시하던 군대의 규모가 축소되었고, 이 틈을 타고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것이다. 경복궁에서 러시아 공사관까지의 거리라고 해봐야 기껏 1.9km, 20분 남짓 걸리는 길이었으되 고종 일행에게는 목숨을 건 탈출 길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단행된 아관파천은 범을 피해 늑대 굴로 들어간 듯한 형세였다. 일본으로부터 보호해준다는 명분으로 러시아는 자신들의 이권을 챙겼고, 고종은 힘없는 늙은이에 불과했다. 조선의 대신들은 거실에 가림막을 쳐서 회의장으로 삼아야만 했다. 그리고 돌아온 곳이 바로 앞 경운궁, 현 덕수궁이다. 그렇게 덕수궁은 대한제국의 정궁이 되었다. 지금 러시아 공사관 터에는 3층탑만 남아있는데 6.25 때 폭격으로 나머지 건물은 파괴되었다. 이곳에서 사진을 찍을 때는 주의해야 한다. 대개는 아무런 일이 생기지 않지만, 간혹 경찰이 사진 촬영을 통제하는 경우가 있다. 영국대사관이 왼편에 있기 때문인데, 그럴 때는 방향을 달리해서 찍겠다고 하면 된다.
러시아 공사관 터에서 시작하는 ‘고종의 길’을 따라 걸으면 덕수궁을 감싸 안으며 성공회 성당 옆으로 나온다. 이 성공회 성당은 87년 6월 민주항쟁 당시 분수령을 마련했던 중요한 장소이다. 6월 민주항쟁과 관련해서는 다음 기회에 다루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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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히스토리 3 – 명동 다시 광화문 쪽으로 와서 동화면세점 앞 중앙차로에서 종로 방향으로 470번 또는 741번 버스를 타면 오늘의 마지막 답사지로 안내해줄 것이다. 버스는 탑골공원에서 우회전해서 명동으로 향한다. 남산 바로 앞에 이르러 오른편에 명동성당이 보인다면 그 맞은편에는 엄청난 규모의 영락교회가 보는 이들을 압도한다. 명동성당은 한동안 약자들의 피난처였다. 김수환 추기경께서 계셨을 때 많은 민주인사들에게 최후의 보루가 되어주었던 곳이다. 반면 영락교회는 제주도 4.3 사건을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서북청년단의 기반을 제공한 곳이다. 남한에 기반이 없던 평안도 출신 인사 중 일부가 영락교회를 중심으로 모였고, 그들이 결성한 단체가 서북청년단이다. 성격이 너무나도 다른 두 곳이 길 하나를 두고 마주 보고 있다는 점도 아이러니이다.
명동은 한성부의 관할 중 한 곳인 명례방에서 따온 이름으로 조선 시대 하급관리들과 무인들이 살던 곳이다. 류성룡 등이 속한 무리를 이곳에 기반한 붕당이라 하여 남인이라고 불렀다. 일제강점기에는 충무로인 본정(本町)과 더불어 일본인 거주지로 유명한 명치정(明治町) 거리였다. ‘장군의 아들’이라는 영화, 드라마에 등장하는 ‘하야시’ 패거리가 근거지로 삼았던 공간이며, 1950~1960년대 우리 문화계를 이끌었던 이들의 집결지이면서 탤런트 ‘최불암’ 씨의 어머니가 운영했던 ‘은성주점’이 있던 장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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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히스토리 4 – 남산한옥마을 명동성당을 지나 남산 바로 아래 ‘남산 1호 터널’ 정류장에 내리면 정류소에서 건너편으로 보이는 곳이 남산골 한옥마을이다. 육교를 통해 건너가 후문으로 들어가면 된다. 남산골 한옥마을은 북촌 한옥마을과는 또 다른 모습의 공간이다. 북촌이 원래의 장소에 있으나 원형을 많이 잃어버렸다면, 남산골 한옥마을은 원형은 그대로 유지했으되 원래의 장소에서 옮겨온 것들이다. 그런데 이곳의 건물들을 보며 마냥 감탄만 할 수는 없다.
‘관훈동 민씨 가옥’이라는 건물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박영효 가옥이라고 설명했었다. 갑신정변의 주역 중 한 명으로 알려진 그 박영효이다. 그러다가 실제 박영효의 집은 이 가옥의 옆집이었던 것을 확인한 뒤 소유 관계를 다시 정리해서 지금처럼 부르고 있다. 다만 박영효의 집이라고 하건 민씨 가옥이라고 하건 언급된 인물들은 대표적인 친일파들이라는 점은 설명에서 빠져있다. 철종의 부마였던 박영효(1861~1939)는 갑신정변 이후 일본으로 망명한 뒤 본격적인 친일파가 되어 일본의 후작이 되었으며, 관훈동의 민씨, 민영휘(1852~1935)는 동학농민운동을 탄압했던 인물로 일본의 자작 작위를 받았다.
그 옆 건물인 ‘해풍부원군 윤택영의 집’의 윤택영(1876~1835)은 순종의 장인으로 일본의 후작이 되었는데 원래 부자였으나 딸을 동궁비(순종비)로 책봉시키는 과정에서 많은 빚을 지게 됐다. 많은 빚에도 불구하고 헤픈 씀씀이 때문에 빚은 점점 늘어만 갔고 ‘채무왕’이라는 별명까지 붙을 정도였다. 윤택영은 빚쟁이를 피해 중국으로 도피했다가 순종 국상 때 잠깐 귀국하기도 했지만 끝내 중국 땅에서 객사했다. ‘옥인동 윤씨’ 가옥 일부는 윤덕영(1873~1940)이라는 자의 것인데, 이 인물은 윤택영의 형으로 순종과 그 비를 겁박해 이른바 ‘한일합방’ 조약에 국새를 찍게 한 공로로 일본의 자작이 되었다. 그는 이마가 넓고 튀어나와 ‘대갈대감’으로 불렸는데, 일제에 빌붙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고 막대한 부를 쌓았지만 동생인 윤택영이 빚쟁이에게 쫓길 때 전혀 돕지 않아 둘 사이에 큰 싸움이 벌어지기까지 했다. 돈 앞에서는 피를 나눈 형제도 소용없었던 모양이다. 어쨌거나 형제의 위대한(?) 업적에 비하면 일본의 대우가 오히려 야박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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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히스토리 5 – 중앙정보부와 통감부 ‘남산 1호 터널’ 정류소에서 조금만 앞으로 가면 육교가 나오고, 육교에서 더 앞으로 가면 오른편에 건물이 하나 보이는데, 과거 중앙정보부 제5별관 건물이다. 이른바 남산의 실적이 만들어졌던 대공수사국이 이곳에 있었다. 현재는 서울시청의 별관으로 쓰이는 곳이다.
별관에서 나와 왔던 방향으로 돌아서면 터널을 만나게 된다. 이곳을 소릿길이라 하여 버튼을 누른 후 지나게 되면 철문이 여닫히는 소리, 타자기 소리 등을 들을 수 있다. 소리가 그리 끔찍하지는 않으니 한 번쯤은 눌러서 걸어볼 만하다. 터널 끝에는 커다란 철문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흔적으로만 짐작할 뿐이다.
터널을 통과하면 ‘남산창작센터’가 있고, 그 건물을 왼편으로 감싸고돌면 또 하나의 터널을 만나게 된다. 짧은 길이지만 남산의 정취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는 코스이다. 터널을 막 지나면 오른편에 ‘종합방제센터’ 건물이 보인다. 지금은 아기자기한 색깔로 꾸며진 곳이지만, ‘중앙정보부 제6별관’ 이른바 ‘지하벙커’이다. 수많은 언론인과 정치인들이 ‘어디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남산의 지하 고문실에서 고문당했노라’고 증언했던 공간이다. 그 반대편 큰 건물은 중앙정보부의 본관이었다. 지금은 유스호스텔로 젊은이들이 이용하는 곳이다. 젊음을 망가뜨렸던 건물에 젊은이들의 이용시설이 들어섰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건물 앞 조그마한 안내판만이 이곳의 끔찍한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다.
유스호스텔에서 조금만 더 내려오면 일본의 통감관저 자리에 마련한 ‘위안부 기억의 터’를 만나게 된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의 승리를 통해 막대한 이익을 획득한 일본은 꼬박 10년을 준비한 끝에 1904년 러일전쟁을 시작했다. 이 전쟁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하자 일본은 앞뒤를 가리지 않았다. 을사늑약을 추진했고, 끝내는 조선을 강제로 병탄하기에 이르렀다. 그 치욕의 공간이 이곳 통감관저 터이다. 그리고 그날의 치욕을 기억하기 위해 조성한 것이 이곳이다. 커다란 원반 모양의 ‘세상의 배꼽’이라는 조형물에는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라고 쓰여 있고, 을사늑약의 주역 하야시 곤스케(1860~1939)의 이름은 거꾸로 처박혀있다. 이곳이 갖는 의미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표현이 아닌가 한다. 기억의 터를 조성하게 된 취지를 담은 영상도 볼 수 있으니 잠깐이라도 짬을 내어 시청하길 바란다.
기억의 터 바로 아래로 보이는 건물이 소방방재센터인데 이곳도 중앙정보부 사무동으로 쓰였던 공간이다. 유치장을 겸하고 있었다. 그 건물의 왼편 길목으로 들어서면 2층 양옥 건물이 있는데 지금은 ‘문학의 집’으로 이용되고 있으나, 당시에는 ‘중앙정보부장 공관’으로 쓰였던 곳이다. 권력 2인자의 거처라고 하기엔 너무 검소해 보이기도 하다. 현재 지하 1층은 카페로 지상 1층은 전시공간으로 이용되고 있어 일반인의 출입을 허용하고 있으니 세상이 많이 변하긴 한 모양이다.
이 외에도 남산 타워 쪽으로 더 올라가면 ‘신사 터’들과 ‘한양 공원비’가 있으나, 지금은 공간만 남아있는 상황이다. 더군다나 통감부 및 총독부로 쓰였던 공간은 공사 중이라 찾아보기 곤란한 여건이다. 다만 지난 호에서 찾았던 백범광장 근처 과학관 옆에 보면 또 하나의 소녀상이 있으니 그곳은 찾아가 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