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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호 [뉴스 뒤집어보기] 조국사태, 그 속에 가려진 ‘불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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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조회 487회 작성일 19-11-13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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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사태, 그 속에 가려진 ‘불평등’

진보 외쳤지만 엘리트의 민낯은 다르지 않았다
조국 개인이 아닌 엘리트 사회에 대한 문제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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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두 달 동안 한국사회의 관심은 단 한 사람에게 집중됐다. 바로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다. 시민들은 서초동 대검찰청 앞과 광화문 광장에 각기 정반대의 이유로 촛불을 들었다. 그 모습은 마치 지난 2016~2017년의 촛불집회를 연상케 했다.
지난 8월 9일 문재인 대통령은 조 전 장관을 법무부 장관으로 지명했다. 수많은 논란을 뒤로하고 문 대통령은 9월 9일 조 전 장관을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그로부터 한 달 뒤인 10월 14일, “서해맹산의 정신으로 검찰 개혁을 완수하겠다”는 출사표를 던졌던 조 전 장관은 씁쓸히 자리에서 내려왔다. 조 전 장관의 부인 정경심 동양대 교수도 24일 검찰에 구속됐다. 여전히 조 전 장관 논란이 지속되고 있고 정국은 한치 앞도 내다보기 어려울 만큼 혼란스럽다.
하지만 결과에 상관없이 ‘한국사회의 새로운 촛불’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조국사태는 도대체 한국사회의 무엇을 건드렸을까? 평범한 소시민까지도 다시 촛불을 들게 한 그 힘은 무엇이었을까? 조국이 쏘아올린 작은 공은 ‘친구와 적의 구분’으로서 정치였다. 국민들은 조국사퇴와 조국수호 중에 한 가지 입장을 분명하게 택하도록 강요받았다. 중립이나 피난처는 없었다. 그들이 서로를 적으로 설정한 이유를 찬찬히 되짚어보자. 어째서 그들은 조국을 지키려하고, 왜 조국을 파괴하려 드는가.

조국수호의 복잡한 심경

서초동에 모인 시민들은 ‘조국수호’와 함께 ‘검찰개혁’을 열렬히 외쳤다. 그 외침의 이면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서초동 촛불집회가 대규모로 확산된 계기는 9월 23일 조 전 장관의 자택 압수수색이었다. 초유의 현직 법무부 장관 자택 압수수색 소식에 조 전 장관이 검찰로부터 강도 높은 견제를 받는다는 의혹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검찰의 표적 수사 논란과 진보개혁세력으로서 조 전 장관의 행보, 그리고 차기 대통령 후보로 꼽히는 점 등이 함께 뒤섞여 조 전 장관의 모습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이미지와 오버랩됐다.
조국사태의 국면에 논두렁 시계 사건이 재조명된 것도 동일한 맥락이다. 2009년 5월 13일 SBS 보도를 시작으로 언론에 대서특필 된 논두렁 시계 사건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검찰 조사에서 ‘권양숙 여사가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이 준 명품 시계를 받아 봉하마을 논두렁에 버렸다’고 진술했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사실관계가 의심스러운 정보였으나 검찰과 언론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크게 여론몰이에 성공했다. 당시 ‘박연차 게이트’와 관련하여 검찰수사를 받던 노 전 대통령은 결국 보도 10일 후인 5월 23일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됐다.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조국 법무부 장관에 대한 보도 양상은 2009년 ‘논두렁 시계’ 보도 상황과 양상이 비슷하고 정도는 더 심각하다”며 검찰 수사를 비판했다.
동시에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을 기억하면서도 조국수호를 외치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검찰개혁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조 전 장관만이 검찰개혁의 적임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들의 눈에는 조 전 장관의 ‘진보개혁적’ 이미지는 노 전 대통령의 것과 달랐다. 어떤 이는 “노 전 대통령 때와 지금은 언론의 반응이 확연히 차이 난다”며, “문재인 대통령이 경희대가 아니라 경희상고를 나왔으면 이렇게 옹호했겠나. 조국 장관은 서울대 나와서 그렇게 싸고도는 게 아니겠나. 엘리트 의식이 정말 뿌리 깊이 박힌 학벌 사회”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조국사퇴의 복잡한 속내

광화문에 모인 시민들은 조국 전 장관이 보여준 위선적 태도에 실망하거나 열광했다. 주로 자녀 교육과 관련한 장면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조국은 여타 기득권층과는 다르다’는 대중의 인식이 점차 실망으로 바뀌어 나갔다.
실제 조 전 장관은 이미 2010년 12월 6일자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나의 진보적 가치와 아이의 행복이 충돌할 때 결국 아이를 위해 양보하게 되더라”라고 고백한 적 있다. 자식에 대한 투자라는 측면에서 보면 조 전 장관은 투사는커녕 개혁세력도 아니었다. 아마도 아버지로서 조국은 자녀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고학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할아버지의 재력’, ‘아빠의 무관심’, ‘엄마의 정보력’이라는 강남가족의 삼박자를 조 전 장관도 모두 갖추고 있었다. 입으로는 진보개혁의 가치를 부르짖는 조국이었지만 다른 기득권층과 별반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모습이 대중에게 드러나자 평소 조 전 장관에게 기대를 품고 있던 사람들은 크게 실망했다. 문재인 정부에 호의적이었던 사람들까지 조국사퇴를 지지하고 나섰다. 반대로 조 전 장관을 별로 좋아 하지 않던 사람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안주거리가 생겼다.
양자 모두 조국사퇴를 주장했지만 차이는 명확했다. 조 전 장관에 실망한 사람들이 모두 “아빠가 조국이 아니라서 미안해”와 같은 노골적인 보수 정치인의 슬로건에 경도된 건 아니다. 또한 서울대와 고려대 학생들이 주도한 조국퇴진 시위에도 공감하지 않았다. 이전부터 조국을 좋아하지 않았던 보수 정치인들이나 명문대 학생 역시 ‘엘리트’라는 점을 꿰뚫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 역시 조 전 장관과 다르지 않은 엘리트일 뿐이었다.
특히 경북대 총학생회는 성명서를 통해 조 전 장관뿐만 아니라 사회고위층의 모든 부정입학을 전수 조사해야 하며, 우리나라 입시제도를 전반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국 개인이 아니라 엘리트 사회 전반에 대해 문제제기를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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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의 평등을 넘어서

홍명교 정보진보네트워크 활동가는 ‘사상의 분단과 인터넷행동주의’라는 글에서 조국사태를 평하며 이렇게 말했다.
“무엇보다 사람들은 자기 계급의 정치, 자기 계급의 이데올로기를 완전히 제거해버렸다. 김어준이나 유시민의 말을 듣고 입장을 정하고, 자신이 평소에 좋아하는 정치인이 유리하냐 아니냐로만 사안을 판단해 버린다. 사상 없는 여론 난투극의 시대다. 조국편이냐 아니냐, 문파냐 아니냐, 황교안팬이냐 아니냐, 박근혜지지자냐 아니냐 이런 식으로 양분되는 정치적 입장은, 민주주의와 아무 상관이 없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부화뇌동한 것은 아니다. 그중에서도 주체적으로 조국지지와 조국사퇴 중에 어떤 정치적 입장을 선택할 것인지 치열하게 고민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평소 ‘진보’의 가치를 지향하면서도 조국사퇴의 입장을 표명했던 이들은 보수야당의 주장과는 달리 조국 개인의 비위나 잘못이 아닌 엘리트사회 전체의 개혁을 요구했다. 여기에는 ‘촛불정부’를 자임했던 문재인 정부도 포함돼 있다. 개혁 주체를 자처했던 문재인 정부도 사실은 개혁 대상의 일부라는 것이다.
따라서 문재인 정부의 슬로건 자체를 문제제기 할 필요성이 있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롭게”로 과연 충분한가? 오직 기회의 평등만으로 공정하고 정의로운 세상, 2017년 촛불집회가 지향했던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 수 있는 것일까?
일각에서는 한국에서 ‘기회’는 이미 평등하다고 말한다. 김창환 미 캔사스대 사회학 교수는 “한국에서 기회평등은 악화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선되었다”며, “대신 개천에서 용이 안 난다. 흙수저론과 같은 현실과 다른 자극적인 논의만 확대재생산”된다고 지적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이미 기회가 평등한 세상에서 기회의 평등을 요구하며 뼈저린 불평등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페어플레이는 아직 이르다

루쉰은 ‘페이플레이는 아직 이르다’라는 글에서 “물에 빠진 개는, 버릇을 고칠 때까지 건져 올리지 말고 계속 두들겨 패야 한다”고 말한다. 간사한 개에게 언제 배신당해 물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100년 전에 쓴 글이니 잔인하다는 얘기는 접어두자. 본뜻은 ‘규칙이 있다고 한들 평등하게 경기를 할 수 없다면, 한낱 말에 불과한 페이플레이를 응당 거부해야 한다’는 말이다.요컨대 기회의 평등을 말하기 전에 공정하고 정의로운 결과가 전제돼야 한다.
10여 년 전에 있었던 강남좌파에 대한 논쟁에서 『강남좌파』의 저자인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 교수는 “강남좌파의 이미지만으로는 정치인에 대한 불신과 혐오의 벽을 뚫을 수 없다”며, “기존 학벌주의의 혜택을 누리고 그걸 바꿀 뜻이 없으면서 외치는 좌파의 비전, 그것이 바로 강남좌파의 한계”라고 비판했다.
당시 서울대 교수였던 조 전 장관은 이러한 비판에 “강남엔 모두 우파만 있고 좌파는 모두 지방과 강북에만 있어야 하느냐”, “비아냥거리는 강남좌파보다는 문화좌파라는 말이 더 맞다”, “지식인과 중산층 이상이더라도 하층을 지향하는 문화좌파는 역사적으로 항상 존재해왔으며 그 역할이 있다”, “중요한 것은 지역을 떠나 모든 좌파들의 연대”라고 반박한 바 있다.
누구의 말이 맞는지를 여기서 평가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 다만 두 달 동안 우리나라를 들었다 놨다 했던 조국사태의 결론이 어떻게 내려지는지와는 별개로, 한국사회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며 어떻게 노력해야 하는지 다시 진지하게 따져 물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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