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5호 [버스타고 떠나는 답사 이야기] 통일로, 민주로, 해방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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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조회 724회 작성일 19-08-01 12:29본문
통일로, 민주로, 해방으로
710번, 151번, 강북01번 연계코스
역사적인 남·북·미 정상회담이 이루어진 올해는 문익환 목사의 방북 30주년이 되는 해이다. 분단 70여 년, 통일은 당위가 아니라 현실이 되어야 한다는 바람으로 해방과 통일운동의 길을 살펴보고자 한다.
언제나처럼 출발지는 광화문 광장이다. 3.1운동과 해방, 그리고 분단을 고스란히 지켜봤던 그곳에서 통일 한국의 한반도기가 펄럭였으면 하는 바람으로 광화문 광장에서 출발하고자 한다.
끝나지 않은 싸움
광화문의 오른편을 보면 동십자각과 함께 북촌이 눈에 들어온다. 몇 해 전 많은 촛불들이 메웠던 그 길이 관광객들의 열기로 가득하다. 그런데 북촌 한옥은 옛 조선 가옥이라고 하기에는 건물규모가 너무 작다. 보통 조선 건축이라면 안채며 사랑채 같은 구분이 있게 마련인데, 많은 북촌의 건물들에는 그러한 구분이 없다. 사실 북촌의 가옥들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의 옛 사대부가(士大夫家) 건물들을 회사들이 사들인 뒤 쪼개어 민간에 매각한 것이다. 그렇기에 북촌의 한옥들은 조선의 그것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일본인들로부터 조선의 건축을 지켰다는 평가와 함께 전통을 파괴했다는 비판도 존재하는 이유이다.
동십자각과 북촌의 입구가 보이는 경복궁역 버스 정류장에서 710번 버스를 타면 오늘의 첫 목적지인 한빛교회에 갈 수 있다. 혹시 버스가 다소 늦거나 조금이라도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정류장의 오른편 골목으로 들어가서 소녀상을 만나고 오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녀에게 따뜻한 미소를 보내고, 그 옆을 지키고 있는 대학생들에게도 응원의 메시지를 전해주길 바란다.
혜화동을 지나며
710번 버스는 인사동과 혜화동을 지나 미아리로 넘어간다. 버스 너머로 보이는 인사동은 북촌의 몰락과 관련이 깊다. 조선의 명문 양반가들이 살던 북촌은 일제강점기 이후 소외된 지역이 되었다. 살림살이가 궁핍해진 옛 양반들의 소장품과 세간살이들은 하나 둘 인사동을 거쳐 새로운 주인을 찾게 되었고, 어느 순간 인사동은 한국 전통문화를 대표하는 곳 중 하나가 되었다. 지금은 상업화되어 예술거리라기보다는 길거리 음식이나 기념품 상점이 더 많아 보이지만 벌써 50~60년 이상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고 미술가들도 여러 곳 있고, 3.1운동과 관련 깊은 태화관도 있으니 한 번쯤 살펴볼 만한 곳이다.
마로니에공원이나 대학로라는 이름 더 익숙한 혜화동은 경성제국대·서울대가 자리 잡았던 곳이다. 서울대가 이전한 후 주택공사가 공터에 마로니에 나무를 심으면서 마로니에 공원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전두환 정권 때는 ‘문화예술거리 조성 사업’으로 주변에 소극장들이 자리를 잡았고, 공연 예술의 메카 역할을 하면서 그 이름을 더욱 알리게 되었다.
혜화동에서 연극뿐만 아니라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아야 할 것은 독립운동의 흔적이다. 버스 오른편으로 마로니에공원 가운데 서있는 늠름한 인상의 동상과 눈이 마주치게 되는데, 의열단의 김상옥(金相玉. 1889~1923)이다. 최근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재조명되고 있는 의열단은 김구의 한인애국단과 함께 의열 투쟁의 최선봉에 서있던 단체이다. 김구의 현상금이 60만 원(현재 약 260억 원)이었고, 의열단 단장인 김원봉의 현상금이 100만 원(현재 약 320억 원)이었다는 사실만 봐도 의열단이 제국주의 침략세력에게 얼마나 큰 공포의 대상인지 짐작할 만하다.
의열단의 단원들 중에서도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인물이 바로 김상옥이다. 1923년 1월 종로경찰서를 폭파한 그는 여동생의 집에 은신하여 총독암살을 준비하였다. 종로서 폭파는 총독 사이토 암살의 예행연습이었다. 이후 일경에게 발각되어 경성의 곳곳에서 일제와 총격전을 벌인 후 탈출하였으나 끝내 효제동 은신처가 다시 발각되어 3시간 남짓 시가전을 벌인 끝에 자결하였다. 400여 일경과의 전투 중에 10명을 사상시키고, 10발의 총상을 입은 상태였다. 《동아일보》는 “오른손을 이미 못 쓰는 상태에서 죽는 순간까지 둘째손가락을 방아쇠에 걸고 권총을 힘입게 잡고 있었다”고 현장을 전하였다.
혜화역을 지나면 또 다른 역사적 이름들이 안내방송을 통해서 흘러나온다. ‘여운형 활동터’·‘조소앙 활동터’라는 방송이다. 여운형(呂運亨. 1886 ~ 1947)은 일제강점기 말 국내 독립운동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건국동맹’부터 ‘건국준비위원회’·‘좌우합작위원회’까지 해방 전후 3년사는 그를 빼놓고는 설명할 수가 없다. 해방 직후 여론조사에서 조선을 이끌어갈 지도자 1위를 차지했던 인물이다. 여운형이라는 이름에는 공산주의자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니지만 그의 행보를 보면 공산주의자보다는 민족주의자라고 부른 것이 더 어울린다. 민족의 나아갈 바를 위한 일이라면 누구와도 대화했고, 누구와도 협력했다. 그랬던 그가 혜화동 사거리에서 테러에 의해 사망한 것이다. 그것이 해방 후에 자행된 여운형에 대한 12번째 테러였다. 주범으로 체포된 한지근은 6.25 중 납북되어 생사를 모르는 상태다.
또 한 명 살펴봐야 하는 인물이 조소앙(趙素昻. 1887 ~ 1958)이다. 교과서에서는 언급조차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 조소앙은 아는 사람보다는 모르는 이가 더 많다. 쑨원의 신해혁명에 동참한 인물이며, 신한청년단과 임시정부의 기틀을 만들었고, 해방 후 건국의 비전이라고 할 수 있는 임시정부의 건국강령의 기초를 만든 사람이 조소앙이다. 1950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권력실세였던 조병옥을 상대로 전국 최다 득표차로 승리한 인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오랜 세월 기억되지 못한 이름이 되었다. 6.25 전쟁 때 납북된 인사이기 때문이다. 89년 납북인사들에 대한 한 차례 포상이 있을 때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을 받았다.
통일로1. 성북동 한빛교회
버스를 타고 미아리를 지나면 ‘도봉세무서·성북시장’ 정류소에 바로 닿는다. 그곳에서 내려 버스 진행방향으로 보면 ‘광제약국’ 건물이 있고, 그 건물 골목으로 우회전해서 5~6분을 걷다보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포장도로가 산비탈에서 내려온다. 거기에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오늘의 첫 번째 목적지 ‘한빛교회’를 만날 수 있다. 건물 사이에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어, 대형교회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누군가의 말처럼 자세히 보아야 볼 수 있다.
이곳은 목사 문익환(文益煥. 1918 ~ 1994)이 시무하였던 곳이며, 민주화와 통일운동 역사의 한복판에서 풍파를 맞아야 했던 곳이다. 목사와 교인들이 권력에 저항하며, 끌려가고 구속되기를 반복했던 곳이니 교세 성장은 고사하고 교회를 지키기도 힘겨운 시절을 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의 교인들은 국민과 함께 하는 삶을 마다하지 않았고, 고난을 축복이라 여겼다고 한다.
조그마한 철문을 들어서서 계단을 오르면 포장된 마당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교회라기보다는 조그마한 휴식공간 같은 느낌을 준다. 화단에는 꽃들이 소담히 피어있고, 담쟁이 넝쿨이 지붕을 대신한다. 바닥에는 아이들이 그려놓았을 놀이판 흔적이 남아있다. 벽면에 세워진 게시판들은 각종 기념행사와 교회 행사들을 소개하는 포스터와 홍보물로 채워져 있다. 교회가 사회와 함께 숨 쉬는 느낌을 받았다면 과한 표현일까?
통일로2. 문익환 통일의 집
버스에서 내렸던 곳으로 돌아와서 151번 버스를 타면 20여 분 만에 두 번째 목적지인 ‘문익환 통일의 집’에 도착할 수 있다. 수유리에서 좌회전한 버스는 한신대 앞에서 우회전을 한다. 우회전을 한 뒤 한두 코스를 더 가야 하지만, 한신대에서 내려 대학을 돌아보는 것도 좋다. 가벼운 산책로를 걷는다는 느낌으로 교정을 걷다보면 정원에 문익환의 시비기 서있다. 서있다기보다는 글자들이 용솟음치고 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지 모르겠다. 한신대에서 조금 더 오르면 화계사가 나오는데 속병과 피부병에 좋다는 약수와 보물로 지정된 동종도 있으니 함께 살펴보는 것도 좋다.
버스가 ‘서울영어마을수유캠프·국립재활원’에 이르면 내려서 진행방향으로 바로 보이는 횡단보도를 건너 같은 방향으로 걷다보면 만나는 첫 번째 세탁소 바로 옆 골목에 통일의 집이 있다. 이곳은 문익환이 성경을 번역하기 위해 마련한 곳으로, 문익환 가족의 숨결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시대와 함께 살아 숨 쉬었던 한 영혼이 어떠한 고뇌를 안고 있었는지 느낄 수 있는 귀중한 공간이다. 박물관에 전시된 박제가 아니라 손때 묻은 그대로의 흔적들이 전시되어 있다. 왼편 아들들의 방이었던 공간과 오른편 기도방을 가득 메운 유물들에는 손때 묻지 않은 것이 없다.
전시물들 사이에서 김약연과 장준하의 흔적도 보인다. 장준하·윤동주·문익환이 어린 시절부터 동무였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문익환이 평생을 품고 지냈다는 장준하의 사진은 동무에 대한 그리움과 살아남은 이의 슬픔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리고 김약연(金躍淵. 1868 ~ 1942)의 사진도 눈에 띈다. 북간도 독립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김약연이다. 문익환의 외삼촌인 그는 북간도 항일주의 공동체의 리더였으며, 윤동주가 나왔던 명동학교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한때 만주의 대통령이라 불렸던 그이지만 너무도 가볍게 기억되고 있다.
민주로. 4.19국립묘지
통일의 집을 나와 버스에서 내렸던 곳으로 돌아오면 ‘강북01번’ 버스를 탈 수 있다. 버스를 타고 가다보면 ‘윤극영 가옥’이라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이곳에서 내려서 잠깐 둘러봐도 좋다. 4.19국립묘지의 1코스 앞이다. 정류소에서 내려 골목에 들어서면 바로 ‘윤극영 가옥’이 나온다. 윤극영(尹克榮. 1903 ~ 1988)이라는 이름은 익숙하지 않아도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으로 시작하는 ‘반달’과 ‘까치 까치 설날은…’으로 시작하는 ‘설날’이라는 동요의 작곡가가 윤극영이다. 서울시가 그의 옛 가옥을 ‘미래문화유산 1호’로 지정했고, 그의 동요운동을 계승하기 위한 활동도 이어지고 있다. 다만 윤극영이 동요운동을 통해 새로운 교육운동과 한국 음악의 길을 제시한 인물인 것도 맞지만, 만주국 산하의 ‘간도성 협화회’의 회장을 했던 친일전력이 있음도 분명한 만큼 그의 친일 행적도 함께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윤극영 가옥에서 나와 버스 진행방향으로 가면 삼거리가 나온다. 삼거리에서 위쪽으로 올라가면 바로 4.19국립묘지를 만날 수 있다. 묘지에 들어서면 대개는 4.19학생기념탑으로 직행한다. 입구에서 보이는 가장 큰 구조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념탑으로 바로 가기보단 왼편 화장실 쪽 계단으로 올라가서 시비들을 거쳐서 참배 드리길 권한다. ‘꽃으로 다시 살아’·‘진혼곡’ 등의 글들은 4.19를 접하는 또 다른 방편이 되리라. 기념탑과 부조의 뒤편엔 묘역이 형성되어 있고, 그 뒤편으로는 ‘유영봉안소’가 있다. 묘역은 이곳이 민주화 운동의 성지임을 보여주려는 듯 태극기가 꽂혀있는 봉분들이 가지런히 모셔져 있다. 유영봉안소에는 4.19 당시의 희생자들 영정이 모셔져 있으나 무엇인가를 더 채워야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비어있는 공간이 꽤나 넓다. 묘역 참배를 끝내고 나오다 보면 4.19혁명 기념관을 만나게 된다. 총 2층으로 이루어진 전시공간은 4.19가 일어나게 된 배경과 당시 시대상, 처절했던 투쟁의 기록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찾는 이의 이해를 돕고 있다.
해방으로. 근현대사 기념관과 독립지사 묘역
마지막으로 살펴볼 곳은 독립지사 묘역이다. 4.19묘지를 나와서 북한산 쪽으로 걸어 올라갈 수도 있지만, 이왕이면 ‘강북01번’ 버스를 타고 가기를 권한다. 걸어가면 거꾸로 올라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버스를 타면 종점에서 하나씩 보며 내려오면 된다.
종점인 ‘아카데미하우스·통일교육원’에서 내려 오른편으로 약간 올라가면 ‘신익희·신하균’ 부자의 묘역을 만날 수 있다. 임시정부의 주요 요인이며, 국민대학교의 설립자인 신익희(申翼熙. 1894 ~ 1956)는 이승만의 강력한 라이벌 중 한 명이었다. 그의 아들 신하균(申河均. 1915 ~ 1975)은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귀국 후 평범한 삶을 꿈꿨으나, 아버지가 대통령 선거 도중 열차에서 급사하면서 정치에 뛰어든 인물이다. 3선의 국회의원을 하는 동안 무소속과 야당 생활을 지속했다.
신익희 묘역 아래로 10여 기의 독립유공자 묘소들이 여기저기에 흩어져있다. 서로 5분 안팎의 거리 안에 있으니 모두 살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이준 묘소와 광복군 묘소는 꼭 들려보길 권한다.
이준(李儁. 1859 ~ 1907)은 헤이그 특사로 파견되었다가 그 곳에서 죽은 것으로 이름이 높은 인물이다. 와세다 대학 출신으로 독립협회, 보안회 등 각종 운동단체에서 활동하였던 젊은 엘리트였던 그가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외치다 이역만리에서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은 당시 조선 민중들에겐 커다란 충격이었다. 그런데 이준의 죽음에 가려 함께 갔던 이위종·이상설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덜한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이위종(李瑋鍾. 1887 ~ ?)과 이상설(李相卨. 1870 ~ 1917)은 북만주와 연해주 지역 독립군 기지 건설의 중심인물로 활약하였다. 권업회, 신한촌, 광복군 정부 등등과 같이 굵직굵직한 단체들에 그들의 피땀이 서려있다.
많은 이들이 잘 모르는 장소가 광복군 묘소이다. 광복군 묘소라 하면 국립 현충원이나 효창원을 생각하지만, 이곳에 모셔진 광복군 묘소도 한 번쯤은 꼭 살펴보길 권한다. 광복군 활동 인사들 중에 자손을 찾지 못한 19기의 시신을 모셨다. 그 중 2기는 이후 자손이 나타나 따로 모셔 나갔고, 현재는 17기만 남아 있다. 다행히 몇몇 뜻 있는 시민단체 인사들이 매년 설과 추석 명절 다음날 오전에, 그리고 현충일에 성묘를 하고 있다. 성묘에 동참하는 것을 누구라도 환영한다 하니 시간을 맞추어 성묘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광복군 묘소를 보고 도로변으로 나오면 근현대사 기념관을 만날 수 있다. 1층 전시 공간에 각종 선언서, 조약문, 광복군 태극기 등을 볼 수 있게 모아놓은 곳이다. 전시물을 그냥 스치듯 보기보다는 문화해설사의 도움을 받아 전시물을 감상하는 것이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2층에서는 각종 강연 행사도 하고 있으니 사전 예약을 한 뒤 찾는 것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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