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2호 [버스타고 떠나는 답사 이야기] 열사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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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조회 579회 작성일 18-11-15 18:29본문
11월에 광화문, 대한민국 모든 도로의 기준이 되는 도로 원점이 있는 곳이다. 이곳이야말로 답사 이야기의 시작점으로 삼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 답사기의 발간 예정이 10월말∼11월이라 듣고, 잠시 고민했다. 가을에 맞는 주제를 할까, 아님 현 시점과 관련 있는 무엇인가를 해야 하나? 하지만 답은 의외로 간단하게 나왔다. 11월에는 전태일 열사를 보러가자. 그를 빼놓고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다만 그 이름을 얼마나 담아낼 수 있을지가 문제일 뿐이다.
슬픈 이름 칭경기념비
전태일 열사의 동상을 보러가는 노선은 많으나 가장 짧은 코스를 선택하기로 했다. 광화문 광장과 동화 면세점 사이의 정류장에서 동대문 종합상가로 가는 버스를 골라 타면 어느 것이나 같은 구간을 운행한다. 260번, 270번, 271번, 721번 등등의 버스 중에서 고르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버스를 타기 전 진행방향의 왼편을 보면 고층건물들과 어울리지 않는 비석과 비각이 하나 서있다. 이 비석의 주인공은 비운의 황제 고종이다. 그는 국왕이었으나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였고, 남편이었으나 부인을 지키지 못한 인물이다. 그리고 조선을 망국에 이르게 한 죄인이다. 하지만 그도 국왕이고, 남편이고자 했다. 그의 몸부림을 보여주는 상징물 중 하나가 바로 이 칭경기념비이다. 정식명칭은 ‘대한제국대황제보령망육순어극사십년 칭경기념비(大韓帝國大皇帝寶齡望六旬御極四十年稱慶紀念碑)’이고, 약칭 ‘고종즉위 40년 칭경기념비’라고 부른다. 고종즉위 40주년과 그가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간 것 등을 기념하기 위해 광무 6년(1902년) 건립한 비석이다. 더불어 황제를 칭하고, 대한제국을 수립한 일도 기념하고자 했다. 국왕과 국가를 동일시하던 시대에 국왕의 강건함을 통해 대한제국의 굳건함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이 비각의 바로 옆으로는 교보문고가 도심 속 약간의 여유 공간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리고 그 곳엔 웬 중년 남성이 의자에 걸터앉아 있다. 표본실의 청개구리를 쓴횡보 염상섭(廉想涉. 1897~1963)이다. 우리나라 현대사실주의, 자연주의 소설의 선구자인 염상섭의 동상은 1996년 문학의 해를 맞아 종묘 공원에 세웠다가 삼청공원을 거쳐 현재 자리로 자리매김했다. 이왕이면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이곳에 터를 잡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곳보단 생가 터인 통인시장 쪽이었다면 더 좋았을지 모르겠다. 차라리 이 자리에 살았던 박인환(朴寅煥. 1926∼1956)의 동상이었다면 어땠을까. 박인환은 명동의 은성주점에서 ‘세월이가면’이라는 곡을 즉석에서 작시한 것으로도 유명한 천재 시인이다. ‘세월은 가고/과거는 남는 것’이라고 읊조리던 시인의 흔적은 이제 작은 표석으로만 남아있을 뿐,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아쉬움에 작은 욕심이 들었다.
그날이 오면
버스를 타자마자 ‘종로 1가’ 정류장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나오면 진행방향의 오른편으로 눈을 돌려보자. 영풍문고 앞에 주변과 어울리지 않는 동상 하나가 앉아있다. 전봉준(全琫準. 1855∼1895)이다. 동학농민운동의 전봉준 동상이 정읍 고부나 공주 우금치가 아니라 서울 한복판이라니? 왠지 어색하다. 이곳은 1895년 4월 24일(양력)에 그가 교수형을 당한 구(舊) 전옥서(典獄署) 터이다. 전봉준은 종로네거리에서 참형당하길 원했지만, 한밤중 교수형으로 삶을 마감했다. 혹여 백성들에게 자극제가 될까 두려워한 일본의 비겁함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의 동상은 서있지 못하고, 손을 짚은 채 앉아있다. 부하의 밀고에 의해 체포되는 과정에서 심한 부상을 입어 그러한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몸은 불편했으되, 의기가 꺾이는 일 따위는 없었다. ‘바른 길을 위해 죽는 것이니 원통하지 않으나, 역적의 누명을 쓰고 죽는 것이 억울할 뿐’이라던 그는 뜻있는 이들의 노력이 모여 그 어떤 자세보다 바르고 굳센 모습으로 그 자리에 다시 앉아있게 되었다.
그 리 고 길 건 너 에 보 신 각 ( 普信閣) , 심 훈 ( 沈熏.1901~1936)이 ‘그날이 오면 기꺼이 머리로 들이 받겠다’고 했던 그 종로의 인경이 보인다. 인사동 입구인 청운교 자리에 세워졌다가 1413년 현재 자리로 옮겨져 세워진 이래 종각은 서울 운종가의 시간과 공간의 기준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이 종각이 있어 종로라 불리었고, 이 종각의 종소리로 사대문이 열리고 닫혔다. 시간을 보는 일이 일상이 되어버린 지금에도 보신각의 타종은 새해를 여는 기준이 되고 있으니 종각을 빼놓고 서울의 역사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다만 보신각은 서울의 고난을 함께하면서 위치가 자주 바뀌었다. 현재는 원래의 자리보다 더 뒤로 밀린 채 위치해있다. 보신각 종도 임진왜란으로 불타면서 폐원각사(廢圓覺寺)의 종을 대신 걸었는데, 이마저도 잦은 화재로 인해 균열이 심해져 1985년 박물관으로 들어가게 되고 현재의 새 종으로 교체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각은 3.1운동의 중심지 중 한 곳이고, 한성임시정부(漢城臨時政府)를 선언했던 곳이다. 존재 자체로 의미가 있는 공간인 것이다.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의 자리에서
종각을 지나면 있는 ‘탑골공원’ 정류소에서는 잠시 내리자. 볼거리 많은 서울이지만, 탑골공원만큼은 반드시 보고 가야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도심 공원이고, 3.1운동의 성지이다. 버스에서 내리면 탑골공원이 아닌 YBM 건물을 향해 나와 가로수 화단을 보며 걸어보자. 관심있게 살펴보다보면 두 개의 표석(標石)을 찾을 수 있다. 하나는 신간회본부(新幹會本部) 터를 알리는 표석이고, 다른 하나는 김수영의 생가 터를 알리는 것이다. 신간회는 1920년대 최대의 민족 단체였다. 식민지 조선에 살던 이들의 염원이 담긴, 그래서 그 이름만으로도 가슴 시린 신간회이다. 이곳이 있어 조선 민중들이 그나마 위안을 얻었다. 그리고 김수영(金洙暎. 1921~1968)!! 박인환의 절친이면서 그만큼 다툼도 많았던 또 한명의 천재 시인이 살던 곳이다. 4.19혁명의 시인이면서,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며’처럼 삶의 고뇌를 거짓 없이 썼던 생활인이었다. 1968년 교통사고로 그를 잃었다는 것은 우리 문학계의 큰 손해가 아닐 수 없다.
탑골공원에 이르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동상이 있다. 의암 손병희(孫秉熙. 1861~1922)의 상이다. 이곳이 3.1운동의 성지이기에 그의 동상이 입구에 서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민족대표 33인의 첫머리를 차지하는 인물이 동학 3대 교주 손병희이기 때문이다. 그의 동상 외에도 이곳에는 ‘3.1운동만세기념비’, ‘용운당 대선사비’(龍雲堂大禪師碑) 등이 오른쪽 공간을 채우고 있다. 하지만 민족대표 33인은 1919년 그날 이곳에 없었다. 그들은 태화관(泰和館)에서 자체적인 독립선언식을 연 뒤에 바로 종로경찰서에 연행되어버린다. 자수였다. 한편 탑골에서는 황해도 해주출신의 정재용(鄭在鎔.1886~1976)이 나서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다. 계획되지 않은 일이었다. 조만간 정재용의 동상도 건립될 예정이라고 하니, 추후 다시 소개할 기회가 있길 바란다.
그리고 이곳에는 원각사지10층석탑(圓覺寺址十層石塔)과 탑비(塔碑)가 오랜 세월을 이기며 자리를 지키고 있다. 유교국가 조선과는 사뭇 이질적인 존재이다. 승려는 출입도 할 수 없었던 조선의 한양에 10층 높이의 대규모 석탑이라니, 아이러니이다. 이러한 모순은 국가적으로는 불교를 억압하지만, 왕실은 불교를 숭상했던 조선 초기의 이중성 때문에 나타난다. 고려 때부터 유서깊은 절이었던 이곳은 효령대군과 세조의 발원에 의해 대규모의 사찰로 변모한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10층 석탑도 이때 건립된 것이다. 지금은 새똥과 매연 등의 피해를 막기 위해 유리막으로 덮여있지만, 큰 건물이 없던 인근에서 오랜 기간 지역의 이정표 역할을 하였다.
탑골공원을 돌아봤다면 공원을 나와 인근에서 잠시 헤매어보자. 전태일이 동생 태삼과 서울로 가출을 나와 추운 밤을 지새운 리어카보관소 자리가 근처 어디 만큼에 있을 것이다. 장소를 특정할 수 없는데다가, 설혹 찾는다하여도 예전과는 사뭇 달라졌을 터이기에 차라리 그 시절을 찾아 헤매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일 거라 생각된다. 잔술을 파는 노점에서부터 내기 장기를 두는 노옹들의 모습 속에서 그 시절을 상상해보는 것은 어떨까. 길을 걸으며 둘러보면 살펴볼 곳은 넘치고도 남는다. 인사동거리도 좋고, 운현궁과 창덕궁 방면도 빼놓을 수 없다. 다만 우리가 가려는 방향과 다르므로 아쉽지만 다음 기회에 보기로 하자.
열사를 찾아서
버스를 내렸던 곳으로 다시 돌아와서 동대문 방면으로 가는 아무 버스나 타면 된다. 두어 정거장을 가서 ‘종로6가·동대문종합시장’ 정류소에서 내리자. 정류장 횡단보도에서 오른쪽으로 건넌 뒤 동대문 시장방향으로 걷다 보면 기업은행이 보인다. 기업은행 앞에서 오른편으로 돌아서면 평화시장의 큰 간판이 눈에 띈다. 평화시장으로 걸음을 옮기면 ‘전태일 다리’가 그 곳에서 찾는 이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그 다리 위엔 앳된 얼굴의 전태일((全泰壹, 1948~1970)이 그 영원한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지금은 그 명성을 잃어 쇠락했지만 당시는 전국 기성복 시장의 70%를 공급했던 이곳 평화시장은 전태일이 아름다운 청년으로 성장했고, 생을 마감함으로써 영원한 삶을 이룬 곳이다. 1964년 시다로 시작해 ‘한미사’에서 재단사가 되었다. 그리고 ‘바보회’와 ‘삼동친목회’를 통해 노동자를 규합하였다. ‘삶을 좀 먹는 노동지옥’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편지를 쓰는 등 제도 내에서의 개선을 추구하였다. 이러한 노력들의 결과 1970년 10월 7일 석간신문에 평화시장의 참상을 보도하는 내용이 실리게 된다. 처음으로 이룬 성과였다.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선거를 앞둔 정권은 앞에서는 회유하고, 뒤로는 협박하고 감시하였다. 몇 번의 시위 시도가 실패로 끝나고, 1970년 11월 13일 그는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거행하였다. 자신의 몸을 불태움으로써!! 노동자의 인간선언이었다. 자신을 불쏘시개로 던진 그의 투쟁은 평화시장을 넘어 전국으로, 노동자를 넘어 모든 민중의 삶이 되었다. 그리고 그토록 원하던 대학생 친구들도 생겼다. 그리고 그는 ‘인간시장’이 섰던 그 자리에서 오가는 이들을 지켜보고 있다.
전태일 다리를 건너면 시장 입구 바닥에 열사가 분신한 장소와 몸에 불을 점화했던 장소의 동판이 새겨져 있다. 그 동판을 보고 왼쪽으로 틀어 동대문 쪽으로 향하면 쇠락해가는 ‘청계천 헌책방 거리’를 만날 수 있다. 강북의 학교들이 떠난 지금 ‘헌책방 거리’는 피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을 온몸으로 맞고 있다. 지금은 20여 곳 밖에 남아있지 않은데다 올해만 해도 2곳이 문을 닫는다하니 ‘청계천 헌책방 거리’가 이름만 남을 날도 멀지 않은 듯하다. 이곳의 서점들에서 보물을 찾듯 책들을 찾아보길 바란다. 절판된 희귀본을 얻는 행운을 기대하며.
평화시장을 지나 오간수교를 끼고 돌면 흥인지문(興仁之門)이 보인다.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라는 유교의 오상(五常) 이론에 따라 동쪽에 해당하는 ‘인(仁)’ 자를 이름으로 하였다. 다만 풍수 지리적으로 볼 때 좌청룡에 해당하는 낙산이 상대적으로 낮아 그 힘을 더하기 위해 다른 대문들과 달리 ‘지(之)’ 자를 더해 네 글자짜리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곳이 보물 1호가 된 것은 일본의 지배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곳으로 통과했다는 이유로 헐리는 것을 모면하고 조선 보물2호로 지정된다. 일본보다 격이 낮은 조선에서의 국보를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남대문은 보물 1호, 동대문은 보물 2호로 삼은 것이다. 그러다가 해방 이후 일본이 지정한 보물 중에 홀수번은 국보로, 짝수번은 보물로 지정하면서 동대문이 보물 1호가 되었다. 즉, 국보와 보물은 구분 자체가 무의미하다.
이 흥인지문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한양 도성 쪽으로 길을 건너면 창신동 거리를 만날 수 있다. 도성공원의 갈대밭이 절경이긴 하지만 이번에는 그냥 지나치자. 동묘쪽으로 차도를 따라 가다가 ‘창신 2동 자치회관’이나 ‘이음피움 봉제 역사관’ 이정표가 보이면 좌회전을 하면 된다. 골목 안으로 들어서서 약 5분여를 걷다보면 왼편에 ‘종로약국’ 간판이 보일 것이다. 이곳에서 다시 좌회전을 하면 ‘전태일 재단’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2층 다목적실과 3층 사무 공간 정도여서 단체 관람객이 찾아가기엔 무리가 있다. 다만 활동가들에게 말씀을 잘 드리면 사무실 한 켠에서 ‘이소선 어머니’의 유품을 보고 올 수 있다. 혹여 2019년 봄 이후에 찾아올 생각이 있다면 이 곳 보다는 ‘수표교’ 옆에 공사 중인 ‘전태일노동복합시설’을 찾아가는 것이 더 좋다. 탑골공원의 반대편으로 YBM 쪽으로 골목길을 걸어서 찾아가면 된다.
그리고 ‘창신동 거리 박물관’을 돌아보는 것도 좋은 답사가 될 것이다. 2017년 도시재생사업의 일환으로 정돈된 이 거리의 곳곳에는 봉제의 역사를 알 수 있는 각종 안내판이 세워져있다. 굳이 안내판들을 다 살펴보지 않더라도 ‘전태일재단’ 인근에 있는 ‘이음피움 봉제 역사관’을 찾아보는 것도 좋다. 직조의 역사를 눈으로 보고, 체험할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할 것이다. 다만 일요일과 월요일, 공휴일은 들어갈 수 없으니 유의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날짜를 못 맞췄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다. 그 거리 자체가 봉제를 생업으로 하는 삶의 공간이고, 역사관이다. 살아있는 전태일들의 삶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충분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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